1970년대 외국에는 그룹사운드가 히트를 쳤다. 월남전으로 인한 반전운동과 함께 록음악이
유행을 하였다.
디퍼플이라든가 유라이어 힙 등 록음악그룹이 활동했고 한국에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통키타 또는 그룹사운드가 탄생하여 활동을 하게 된다.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등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각종 가요제를 통하여 그룹사운드가 세상밖으로 나와 활약하게 되었다.
홍익대의 블랙테트라, 건국대의 옥슨, 항공대의 활주로, 서울대의 샌드페블즈, 산울림 등이 젊음의 열기를 록음악으로 표현하던 시기다.
그밖에 미 8군에서 활약하던 신중현, 사랑과 평화 등도 그룹사운드 등이 열풍의 주역들이다.
활주로는 항공대 재학생들로 구성된 그룹사운드인데
Runway라는 그룹명칭으로 출발하였다. 항공대하면 항공기가 있고 캠퍼스 가운데에 활주로(runway)가 있어서 항공대를 상징하는 활주로를 이름으로 쓰게 된 것이다. 그 당시 그룹사운드 활주로를 회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짠한 느낌이 든다.
국립 한국항공대학의 여건이 열악하여 그룹 활주로가 연습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본래 그룹사운드는 드럼, 전자기타, 오르간 등 시끄러운(?) 악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강의실 주변에서 연습 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항공대학의 학생회관은 경의선 기찻길과 활주로 사이의 단층건물이었는데 거기에는 학생회, 학보사등 서클, 학생편의시설이 주로 입주해 있어 그룹사운드 활주로가 입주할 공간이 없었다.
교수들은 국립대학이라서인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근엄하시고 면학을 강조하시는 교수님은 청바지에, 빛바랜
티셔츠, 슬리퍼 신고 교정을 걷는 학생의 모습을 좋아하지 안으셨다. 싫어하셨다.
학점도 타대학에 비해 무척 짜게 주었다.
유급자가 폭발적으로 많았던 항공대학이었다.
그러던 중 활주로는 학생과장님의 배려로 대학 강의실에서 멀리 떨어진 운동장가 한쪽 편에 폐차된 버스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밴드연습을 해야만 했다.
공연은 주로 대학 축제때 하였으며 활주로 연주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항공대학에는 대강당이 따로 없어서 항공기 격납고(항공기를 정비하는 대형 창고)에서 항공기를 밖으로 이동시키고 연주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활주로의 연주실력과 열기는 대단하였다.
타대학 학생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을 빌려 연주회를 하기도 했는데 감동적이었다.
활주로는 외국곡도 많이 연주하였지만
자작곡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강변가요제 입상곡), 탈춤(대학가요제 입상곡)등을 연주하곤 하였다.
연주자들의 복장은 항공기 조종복이나 정비복을 입고 나와 특색이 있었다.
초기 멤버로는 라원주, 이응수, 배철수, 지덕엽 등 우수한 음악적 능력(작사, 작곡)을 갖춘 싱어와 연주자가 팀을 이끌어 왔다.
지금처럼 대중매체가 많지 않아서 라디오나 전축을 통해서 활주로 노래를 들어야 했던 시절이다.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준 고마운 록음악의 선구자들이다.